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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헨리 8세, 숙종의 여인들. (전편)

by 하야니2 2010. 9. 27.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1332650

 

 

조선의 헨리 8세, 숙종의 여인들.

 


잉글랜드의 헨리 8세는 매우 유명한 인물이다.

위대한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아버지로서의 유명함 이라면 그 자신에게도 자랑스러울 테지만, 지금 말하고자 하는 유명함은 그리 명예롭지는 못한 유명함이다.


튜더왕조의 헨리 8세는 여섯 명의 왕비를 가진 왕이다.

첫 번째 왕비와는 이혼했고, 두 번째 왕비는 간통죄로 죽였으며, 세 번째 왕비는 아이를 낳다 죽었고, 네 번째 왕비는 이상형(?)이 아니라는 이유로 결혼 무효를 선언했고, 다섯 번째 왕비는 정말 간통하다 걸려 죽었으며, 여섯 번째 왕비는 두 번 결혼한 전력의 과부를 맞이했다.


여기 조선에 그와 유사한 화려한 전력을 자랑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조선 19대 국왕 숙종이다.


그는 세 명의 왕비와 여섯 명의 후궁을 두었다.

뭐, 왕비를 세 명까지 둔 왕은 조선역사에서도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그 정도야 부인복이 없나보다고 넘어갈 수 있다. 여섯 명의 후궁도 역대 왕들의 후궁 수 평균에도 못 미치는 숫자이니 화려한 여성편력이라고 몰아세우기엔 부족하다.


물론 후궁이 여섯이라고 못 박을 순 없다.

기록 되지 않은 후궁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기 때문이다.

특히 왕의 손을 탄 궁녀들이 기본적으로 오를 수 있는 품계인 정 5품 특별상궁을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간 궁녀라면 후궁에서 제외 됐을 수도 있다.

확실히 왕의 후궁이라 하면 종 4품 숙원부터를 말하니 말이다.


숙종이 헨리 8세와 비교 되는 이유는 헨리 8세가 아내들을 처리 했던 방식과 유사하게 자신의 여인들을 처리했기 때문이다.

 

 

숙종의 첫 여인은 누가 뭐라고 해도 그의 첫 왕비인 인경왕후 광산 김씨이다.

숙종과 인경왕후는 1661년(현종2년)에 한 달 터울로 태어났다.

 

숙종은 꽤 귀한 아들이었다.

왕의 후계자였으니 당연하지 않느냐 하겠지만, 숙종은 그보다 더 귀하디 귀한 아들이었다.

숙종의 조부인 효종은 왕후에게서 1남 6녀를 얻었고, 후궁 셋 중 단 한 명 만이 옹주를 하나 낳았다.

효종의 후계를 외동아들인 현종이 이어 받은 것은 당연했다.

현종은 오직 왕후에게서만 1남 3녀를 얻었다. 여기서 1남이 바로 숙종이다.

숙종은 무려 2대 독자인 셈이다.


조선은 효종 이후로 후계를 얻는 것이 점점 힘들어 졌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가 여섯 명의 아들을 낳았고, 그의 장자인 소현세자가 세 명의 아들을 낳은 것과 비교 하면 효종 이후의 생산력은 저주를 받았나 싶을 정도다.

숙종 이후로 약 150년 간 왕후에게서 원자를 보지 못한 것은 그 때 당시로선 나중의 일일 뿐이었고, 당장 2대 독자인 숙종이 얼마나 귀하게 길러졌을지는 두 말 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능한 일이다.


숙종은 7세가 된 1667년 왕세자에 책봉 되었고, 1671년 11세의 어린 소년과 소녀는 부부라는 이름에 앞서 조선국 왕세자와 왕세자빈으로서 첫 대면을 하게 된다.

서로가 낯설었을 것이 분명한 어린 부부는 적어도 자신들이 백년해로할 것임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던 1674년 19세 나이에 왕위에 오른 현종은 별 다른 업적 없이 15년간 왕좌만 지키다 서른넷의 창창한 나이로 사망했다.

계승자는 14세의 아직도 어린 소년이었던 숙종이다.


한편 어린 왕 숙종의 심중에는 국정에 대한 계획이 움트고 있었다.

숙종은 어려서부터 유약한 부왕 현종이 아닌 조부인 효종을 닮았다고 알려졌다.

왕세자로서 현종을 이리 치고 저리 쳤던 서인과 남인의 행태를 결코 가볍게 보지 않았다.


그 증거가 대표적인 서인 가문 출신인 왕비를 무려 2년간 정식 왕후 책봉을 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부왕이 안배한 왕세자빈으로서 숙종이 등극할 때 옆자리에 섰던 인물은 인경왕후 본인이 맞다.

숙종 또한 즉위 후 곧바로 김만기를 국구인 부원군으로 봉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인경왕후 또한 중전으로서 소임을 다했을 것이다. 하지만, 책봉은 받지 못했다.


일이 이렇다 보니 남인 입장에서는 좋은 먹이거리였다.

서인의 거두인 송시열과 역시 서인의 대표이자 왕의 국구인 김만기 등을 죄인이라고 부르길 서슴치 않았고, 죄인의 딸이 중전의 자리에 있다고 노골적으로 꼬집었다.

그제야 숙종은 마치 서인과 왕비를 보호한다는 듯이 1676년 숙종 2년에 중전 김씨를 정식으로 왕비로 책봉했다.


1679년 숙종 5년 왕비가 19세의 나이에 해산을 하였다. 낳고 보니 공주였고, 그나마 태어난 다음날 죽어 버렸다.

다음해에도 왕비는 임신 중이었고, 그나마 무사히 출산하지 못하고 조산했다.

역시 공주였고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유산한지 두어 달 만에 왕비가 병을 앓기 시작했고, 두창이라고 확진을 받은 지 일주일 만에 2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두 번째 왕비인 인현왕후 여흥 민씨는 숙종보다 6년 늦은 1667년 민유중의 딸로 태어났다.


인현왕후가 어렸을 때만해도 정국은 남인의 주도하에 있었다.

대표적 서인 집안인 인현왕후의 친정은 남인의 등쌀에 시달려야 했다.

만약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지 못했다면 그해 사망한 인원왕후 김씨의 빈자리를 인현왕후가 메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왕후의 자리란 언제나 정국을 주도하는 세력에서 배출하기 마련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새 왕비의 간택은 서인의 주도하에 이루어 졌고, 1681년(숙종7년) 15세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인현왕후가 왕비가 되어 입궐하기 전에 이미 숙종과 훗날 장희빈이 되는 장옥정의 만남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장옥정은 숙종보다 두 살 연상으로 1659년 태어났는데, 아버지 장경의 집안은 유서 깊은 역관집안으로 유명했으며, 외조부인 윤성립 역시 사역원(통역 업무로 하는 관청)의 관리로서 역시 역관이었다.

윤성립의 첩녀인 장옥정의 어머니 윤씨는 노비 출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인조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사촌 형제인 조사석의 처갓집 종으로 조사석과는 사통하는 관계였다고 (무려)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장옥정은 어머니의 정부(情夫)인 조사석을 통해 입궐할 수 있었다.

장옥정은 애초에 궁녀로서가 아닌 왕에게 선보일 여인으로서 입궐한 듯 보인다.

이유는 장옥정이 입궐할 때의 나이가 22세로 궁녀로 선발될 나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장옥정은 특히 숙종의 증조할머니뻘이 되는 인조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비호를 받았는데, 숙종과의 첫 만남도 인경왕후 사망 후 대왕대비 조씨의 전각에서였을 가능성이 크다.


자못 미색이 고왔던 장옥정은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 청풍 김씨의 노여움을 받아 궁에서 쫓겨나게 된다.


왕대비 김씨의 노여움은 장옥정이 천출이라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그녀가 남인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서인 출신 왕후로서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왕비의 자리가 비어있는 지금 남인이 미는 여인이 총애를 받는다면 다음 왕비의 자리를 남인이 차지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장옥정은 궁에서 쫓겨나고 인현왕후는 왕비로서 입궐하게 된다.

역사적 라이벌이라 일컬어지는 두 여인의 행보는 이렇게 첫 등장부터 엇갈렸다.

이 모든 일은 1680년 10월에서 1681년 3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무사히 왕후 책봉을 받은 인현왕후였지만 아직 15세의 어린 나이였다.

21세의 건강한 성인 남성으로서 숙종은 나이어려 여물지 못한 왕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특히나 원숙한 장옥정을 본 다음 이었으니 더더욱 왕비를 가까이 하지 못했다.


그렇게 2년의 세월이 흘러 왕대비 명성왕후 김씨가 42세의 나이로 1683년 세상을 떴다.


장옥정을 쫓아내고 다시 입궐할 수 없게 만들었던 걸림돌인 왕대비가 사라지자 장옥정은 다시 기회를 잡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처럼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무리 왕의 결심이 확고 하다해도 모후에 의해 내쫓긴 궁녀를 모후가 죽고 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불러올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시 또 세월이 흘러 1686년(숙종12년) 인현왕후의 나이 스물이 되었다.


이미 왕후의 자리에 앉은 지 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인현왕후는 잉태 한번 해보지 못했다.

왕후의 생산력에 문제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왕이 찾아 주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지 않나 싶겠지만, 조선의 왕과 왕비의 동침은 개인의 호불호를 떠나 국가적 대사였다.

왕후의 잉태는 왕실의 존망이 걸린 일이었으니 왕의 개인적 취향이 왕비에게 있지 않다고 해도 동침을 거부 할 수는 없었다.

반드시 한 달에 1회 이상은 택일 받은 날짜에 왕비와 동침을 해야 하는 것 역시 왕의 의무 중 하나였다.

인현왕후는 자신이 석녀(石女:불임인 여성)임을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인현왕후는 먼저 숙종이 과거 총애했던 궁녀인 장옥정을 재 입궐 시켰는데, 그 대가로 후궁을 간택할 것을 청했다. 왕으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후궁 간택이 진행 되는 와중에 장옥정이 먼저 입궐했고, 왕의 총애는 기다렸다는 듯이 장옥정에게로 향했다.

무려 5년 만에 재회한 둘은 불처럼 타올랐다.


달달한 연애를 즐기고 있는 숙종과 장옥정이 궁궐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을 때,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는 듯 후궁 간택이 내려진지 한 달 만에 서인 집안인 영의정 김수항의 종손녀이며 김창국의 딸인 안동 김씨가 후궁에 간택되어 종 2품 숙의에 봉해졌다.


숙의 김씨는 훗날 영빈 김씨가 되는 인물로 1669년 태어났으며, 숙종보다 8년 연하의 여인이었다.

18세의 나이에 후궁 간택을 받아 숙의에 봉해졌고 입궐 후 두 달 만에 정 2품 소의가 되었으며 다시 6개월 후에 종 1품 귀인이 되었다.

이런 파격적인 승진 행보를 비추어 보면 마치 김씨가 숙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숙종은 김씨를 잘 찾지 않았다.

오히려 김씨의 파격 승진은 총희(寵姬) 장옥정에게 후궁첩지를 내리기 위해 포석에 지나지 않았다.


1686년 11월 5일 간택되어 입궁한지 7개월 밖에 되지 않은 김씨를 귀인에 책봉한다는 교지를 내리자 승정원에서는 간택 후궁이라고는 하나 너무 파격적인 진급에 반대했고, 숙종은 이를 묵살하면서까지 김씨를 귀인에 책봉하는 것을 고집했다.


바로 그 다음 달인 12월 10일 숙종은 그때까지도 궁녀의 신분이었던 장옥정을 종 4품 숙원에 책봉했다.

전례로 보아 잉태하지 않은 궁녀에게 첩지를 내리는 것은 파격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이미 김씨를 통해 파격적 승진이 무엇인지 본보였던 숙종은 큰 무리 없이 장옥정을 후궁에 봉하는데 성공한다.


숙종 14년인 1688년 왕실에 두 가지 큰 사건이 일어난다.


가장 먼저는 인조 계비 장렬왕후 조씨가 8월 26일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장옥정으로서는 가장 든든한 조력자이자 버팀목을 잃은 셈이었으나, 금세 새로운 버팀목을 얻을 수 있었다.

그해 10월 28일 숙종의 장자인 왕자 윤을 낳은 것이다.

숙종의 나이 28세, 장옥정의 나이 30세였다.

 

왕손을 잉태함은 실로 인경왕후 마지막 회임 이후 8년 만의 일이었다.

잔뜩 기대를 한 숙종은 그 증명으로 장옥정이 출산하기 전에 정 2품 소의로 책봉하여 네 단계를 건너뛰는 진급을 시켜 버렸고, 장옥정은 왕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드디어 왕자를 얻은 숙종은 다음해인 1689년 1월 11일 왕자 윤을 원자로 정함을 공표 하였고, 15일에는 원자의 생모인 장옥정을 정 1품 희빈에 책봉한다는 교지를 내렸다.

 

서인들이 크게 반발하자 송시열과 영의정 김수흥을 파직시켜 귀양 보내고, 전 영의정 김수항마저 귀양지에서 사사하였으며, 송시열 역시 다시 귀양지 제주도에서 서울로 압송하던 중 서울에 올 때까지 못 기다리겠다는 듯 정읍에서 사사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몰락하여 대표들이 모두 귀양을 가거나 사사되었고, 이를 틈타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된 사건이었다.


이때에 당시 귀인 김씨(훗날의 영빈 김씨)의 집안이 크게 몰락하였으니, 귀양 간 영의정 김수흥과 사사당한 전 영의정 김수항이 모두 김씨의 종조부였다.

서인의 거두로 한 시대에 두 명의 영의정을 배출한 집안이 몰락하게 된 계기는 바로 집 안 사람이 후궁이었기 때문이었다.

귀인 김씨가 왕의 동정을 김수항에게 누설했다는 죄목이었던 것이다.

같은 해 1689년 4월 22일 결국 귀인 김씨가 먼저 폐출되어 사가로 내쳐졌고, 뒤이어 5월 2일 인현왕후 역시 폐서인 되어 사가로 내쫓겼다.


장옥정의 왕후 책봉의 걸림돌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특히 장옥정은 당시 두 번째 회임을 하고 있었다.

1690년(숙종16년) 6월 16일 원자 윤이 왕세자로 책봉 되었고, 9월 16일에는 또 왕자를 낳았다.

이름을 성수라고 지었으나 열흘 만에 죽고 말았다.

그러나 죽은 왕자도 장옥정의 중전 책봉을 막지 못했다.

그해 10월 22일 장옥정에게 드디어 왕후 책봉 교지가 내려졌다.

장옥정의 나이 32세였다.


어쨌든 드디어 왕후의 자리를 꿰어 찬 장옥정과 어렵게 얻은 아들을 반석위에 올린 숙종으로서는 마음의 긴장이 한순간에 놓아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숙종은 장옥정을 보기 전에는 여색을 그다지 가까이 하지 않았다.

나이 서른의 남성인 숙종은 그때까지 두 명의 왕후와 두 명의 후궁을 제외 하고는 궁녀를 가까이 했다는 기록이 없다.

왕손을 번창시켜 왕가를 든든히 해야 할 왕의 의무를 생각하면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왕은 신하들 입장에선 의무를 방기하는 짓이라고 생각할 만 했다.


장옥정을 왕후에 앉힌 이후 숙종은 여색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다.

이때에 숙종의 후궁으로 등장하는 여인들이 바로 영조를 낳은 최숙빈과 연령군을 낳은 박명빈, 그리고 유소의이다.

 


이들 중 가장 먼저 후궁첩지를 올린 것은 최씨였다.

최씨는 1693년(숙종19년) 4월 26일 24세의 나이로 처음 내명부 종 4품 숙원을 받았다.

최씨가 가장 먼저 후궁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잉태를 했기 때문이었다.


최씨가 아직 숙원에 책봉되는 계기가 되었던 일화가 하나 있다.

첩지를 내리지 않았으나 이미 왕의 승은을 입은 다음이었으니 승은상궁의 신분이었을 것이다.


하루는 숙종이 낮잠(임금의 낮잠은 오수라 한다)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

용이 땅속에서 나오지 못해 애를 쓰다가 머리를 겨우 빼고는 숙종에게 울면서 살려 달라 애원하는 것이었다.

잠에선 깬 숙종은 누군가의 태중에 있는 자신의 아이가 위급한 상황에 처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곧 바로 장옥정의 처소로 달려갔다.

승은을 입은 지 얼마 안 된 최씨가 아닌 자신의 아이를 둘이나 출산한 장옥정이 또 임신을 한줄 알았던 것이다.

왕비였던 장옥정의 처소에 도착한 숙종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장옥정과 궁녀들이 처소 뒷마당에 모여 안절부절 못하고 있음을 본 것이다.

캐물어도 묵묵부답인 장옥정을 의심한 숙종은 담장 아래 엎어져 있는 큰 장독을 보고 수상히 여겨 치우라 명하였고, 고문당하는 와중에 왕의 행차를 알고 부랴부랴 장독 안에 가둬 숨겨진 최씨를 구하게 된다.

장옥정은 최씨가 왕의 승은을 입어 회임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위기감을 느껴 잡아다 죽이려고 하였고, 마침 최씨의 태중에 있던 용종이 숙종의 꿈에 나타나 자신과 모친을 구했다는 이 일화 속 왕자는 최씨의 첫째 아들인 영수였다.


영수왕자는 1693년 10월 6일 태어났으나 겨우 두 달 만에 죽고 말았다.

그 첫 왕자는 일찍 죽었지만, 어머니인 최씨에게 든든한 첩지를 안겨 주었고, 후손이 빈(貧)한 왕실을 걱정하는 숙종에게 빠른 생산력을 보인 궁인 최씨를 인식 시켰다.


숙빈 최씨에 대한 기록은 다른 후궁들 보다는 많은 편이다.

그녀가 왕의 어머니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기록들은 대부분 풍문이나 설화의 성격이 강했다.

예를 들어 최씨와 인현왕후와의 관계 등이 그렇다.


기록들은 일관되게 최씨의 출신이 미천하다고 기록 하고 있는데 미천한 최씨가 어린 시절부터 인현왕후와 인연이 되어 그 집에서 길러졌고, 인현왕후가 중전이 되어 입궐하게 되자 왕후를 따라 궁에 들어왔다는 설도 있는데 실록에는 최씨가 숙종 2년(1676) 7세에 궁녀로 선발되어 입궁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씨의 출신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많다.

최씨는 무수리로 알려져 있었다.

무수리는 궁에서 일하는 노비를 말하는데 주로 물을 길어 나르는 것을 주업으로 해 수사라고도 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최씨가 7세에 선발되어 입궁했다는 실록의 기록을 들어 본래 궁녀출신이라고 하기도 한다.


특히 최씨와 아들 영조와의 일화를 들어 침방나인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 일화란, 어느 날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던 영조가 문득 어머니에게 묻기를

“침방에서 일하실 때 무슨 일이 제일하시기 어렵더니까?”

하니, 최씨가

“중누비, 오목누비, 납작누비 다 어렵지만 세누비가 가장 하기 힘들었더니다.”

라고 말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모친의 말을 들은 영조는 이후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김용숙 교수의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라는 책에 수록된 이야기로 김용숙 교수는 이를 고종황제가 후궁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숙종 당대 인물이었던 이문정의 저서인 수문록(숙종, 경종, 영조 시대 당쟁사를 기록한 책)에는 최씨가 중궁전 지밀나인 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이 어느 깊은 밤 궁궐 안을 거닐다 나인들 처소를 지나게 되었는데 유독 한 나인의 방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어 호기심에 몰래 들여다보았더니 나인 하나가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상 앞에 꿇어 앉아 있더란다.

숙종이 이상히 여겨 “너 지금 뭐하고 있느냐?” 물으니 궁녀가 대꾸하길

“소녀는 중전의 시녀로서 특별한 총애를 받았습니다.” 라며, 폐비된 인현왕후의 탄신일이 내일이라 생신상을 차려놓고 하례 올리고 있었다는 대답이었다.

숙종이 그 충정을 가상히 여겨 최씨를 총애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이었다.

수문록은 이때를 1692년(숙종18년)이라 기록하였고, 인현왕후의 탄신일 하루 전날이니 음력 4월 22일이었다.


이렇게 왕과의 첫 만남을 이룬 최씨는 곧바로 다음해 숙원이 되어 영수왕자를 출산 하였고, 영수왕자가 두 달 만에 사망하여 상심한 와중에도 금세 임신하여 1694년 9월 13일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 이금을 출산 하였다.

숙종은 몸을 푼 지 얼마 안 되어 임신을 한 최씨의 왕성한 생산력을 치하하며 출산 전인 6월 2일 종 2품 숙의를 내렸다.


물론 최씨의 승급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1694년 6월 1일 폐비된 인현왕후가 복위된 것이다.

인현왕후가 복위된 바로 다음날 숙의 책봉을 받았다는 것은 최씨가 인현왕후의 복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반증이었다.

최씨를 향한 왕의 총애는 날로 깊어졌고, 충심을 다한 인현왕후의 복위로 인해 든든한 뒷배까지 생긴 최씨는 그야말로 조선판 신데렐라의 전형이었다.


한편 1689년(숙종15년) 5월 4일 23세에 폐비되어 사가로 내쫓긴 인현왕후에 대한 숙종의 마음은 3년이 지날 무렵 강경했던 초반의 입장에서 많이 누그러진 상태였다.

최씨와 첫 만남을 했던 그해가 3년째 되던 해였는데, 만약 인현왕후에 대한 감정이 누그러지지 않았다면 폐비의 생일상을 진헌하던 최씨의 행동은 크게 죄를 물을만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최씨는 초반부터 장옥정과 안 좋은 관계로 시작 했다.

모시던 주인인 인현왕후가 장옥정으로 인해 쫓겨났고, 천우신조의 기회로 승은을 입어 회임까지 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것도 장옥정이었으니 자신이 장옥정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음을 절감 했을 것이다.


최씨와 서인의 동맹은 어찌 보면 필연이었다.

최씨는 끊임없이 인현왕후가 무고함을 숙종에게 고하였고, 노골적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돼야 함을 주장했다.

숙종도 그런 최씨의 주장을 충정이라 하여 매우 기꺼워했다.


그러던 중 1694년(숙종20년) 최씨가 두 번째 회임을 했음이 알려졌을 때, 장옥정이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남인은 서인이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려 한다고 비난하였고, 서인들은 남인이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고 비난했다.

이때 최씨가 숙종에게 남인이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고 주장했고, 숙종은 정황 확인도 없이 남인 숙청에 들어갔다.


갑술환국의 시작이었다.


‘최씨 독살 사건’을 계기로 4월 12일 장옥정이 폐비되어 희빈으로 강등되었고, 이어 6월 1일 폐비 된지 5년 만에 인현왕후가 복위되어 그 다음날인 6월 2일 최씨의 숙의 진봉례를 중전으로서 축하 할 수 있었다.


이 해(1694) 인현왕후의 나이 28세였고, 장옥정(당시 희빈)의 나이 36세, 최씨(당시 숙의)의 나이 25세였다.

 

(후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