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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肅宗) 이순(李淳)

by 하야니2 2010. 8. 25.

http://nang01.cafe24.com/wiki/wiki.php/%EC%88%99%EC%A2%85

 

조선 숙종(肅宗) 이순(李淳)


 

2.

http://blogfile.paran.com/BLOG_1005960/201001/1263947987_126346462971269.jpg

(숙종의 어필. 다혈질이었다는 그의 성품이 느껴지는가?)


 

조선의 역대 국왕
18대 현종 이연 19대 숙종 이순 20대 경종 이윤

조선의 제 19대 임금(肅宗, 1661~1720, 재위:1674~1720).


 

현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명성왕후 김씨. 그는 왕비를 3번 들였는데[1] 그 중 2번째 왕비가 저 유명한 인현왕후 민씨 되겠다. 본격 한국의 헨리 8세


 

주로 본인이 중심이 되기 보다는 왠지 장희빈을 소재로 드라마화 될 때마다 사극에 나오는 일이 자주 있다. 장희빈이 주역인 탓에 사극 등에서는 우유부단한 이미지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밑에서 보듯이 실제 성격은 얼음같이 싸늘하고 냉철한 정치가. 결코 치맛바람에 휘둘리는 나약한 왕이 아니었다.


 

정실부인 소생의 장남인데다가 (사실 외아들이지만) 외척에게 딱히 트러블도 없어 꿀리는게 없는 왕이었다고 한다. 왕비소생의 장남으로서 원자-세자-왕으로 이어지는 테크를 제대로 밟고 정상적으로 왕의 임무를 수행해낸 조선시대의 거의 유일한 왕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문종인종은 왕위에 올라 단명했고 연산군은 반정으로 축출되었다. 원손-세손-왕의 테크를 탄 정조의 경우 사도세자의 문제가 있었다. 즉 숙종의 막강한 힘은 왕위에 오를 때 어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으며, 오로지 스스로가 가지고 있던 정통성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통과 질서를 강조하는 조선왕조에서도 정말정말 보기 드문 케이스. 정통성면에서 꿀릴게 없는지라 왕권을 마음대로 휘두룰 수 있었고 이 양반 시절에 신하들을 손바닥안에서 가지고 노는 환국이 그렇게 많이 일어난 것도 이런 정통성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릴 적부터 몸이 허약했지만, 성미는 매우 같아 궁녀들이 머릴 빗겨주거나 옷을 갈아입는 것조차 싫어했다고 한다. 결국 머리 빗겨 주는 것은 대비가 직접 했다고 하는데, 그나마도 못 참아서 발광을 하자 빗등으로 머리를 쳐가면서 빗겼다고 한다(...) 장희빈의 사사도 어찌 보면 사랑했던 여자가 거추장스러워지자 쓰레기 치우듯이 죽인 셈.


 

조선왕조의 과거사 정리에 관심이 많았는지 정종단종을 추증했다. 정종은 본래 "공정왕"이라는 시호만 있고 묘호가 없었는데 이때 묘호를 얻었고, 단종은 이때까지 "노산군"이라 불렸는데 숙종이 "노산대군"으로 올리고 다시 단종으로 추증했다.[2]


 

태종의 형인 희안대군 이방간의 자손들이 정식으로 왕족으로 복귀한 것도 이때였다. 그 전까지는 역적의 후손이란 이유로 이름만 왕족이고 왕족으로서의 혜택은 아무 것도 누리지 못했다.


 

그 밖에도 백두산 정계비로 국경을 바로 잡았으며, 왕실의 족보를 수정했다.


 

즉위하기 전부터 송시열을 미워해 결국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이로서 인조, 효종, 현종의 세 왕을 섬긴 거물 정치가 송시열은 "어어-" 하다가 목숨을 잃었다(이 때 송시열이 샤약 한 사발에 안 죽자, 세 사발을 먹여서야 죽었다고 한다. 자세한 건 사약 참조).


 

숙종의 진면목은 바로 환국정치의 창시자로 그 이전까지 정국이 붕당 간의 적절한 견제와 균형으로 이루어졌다면, 숙종 즉위 후에는 "너 죽고 너 다시 한 번 더 죽자" 식으로 전개되었다. 간단하게 임금이 남인을 선택하면 서인이 죽어나가는 거였고, 서인을 선택하면 남인이 죽어나가는 형태였다. 이로 인해 집권당파가 바뀔 때마다 보복성 숙청으로 피바람이 몰아쳤다(…). 그리고 숙종은 왕비인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적절히이용해 환국을 일으켰다. 보통 조선역사를 배울 때 이러한 숙청시기를 XX환국으로 표현한다(예로 기사환국).


 

이러한 환국정치는 숙종의 왕권강화책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며, 숙종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3] 그 여파로 숙종은 살아서 신하들에게 존호까지 받게 되었고(그만큼 신하들이 그를 두려워 한다는 뜻), 충(忠)의 상징인 관우를 대대적으로 홍보해 신하들에게 반강제로 충성을 강요하게끔 한다.


 

자신이 죽인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훗날 연산군처럼 피바람을 불게 할까봐 두려워 노론과 공모해 경종을 폐세자하려던 중, 노환으로 사망. 이 경험 때문에 노론은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반면 소론은 이것을 이용해서 피바람이 일게 한다.


 

숙종이 잦은 환국과 신권을 억누르는 정치를 한 탓에 몸이 약한 경종이 즉위하면서 정국은 개판 오분전이 되어버렸고, 점점 소수붕당의 독재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영조, 정조 시대에는 탕평책을 밀어붙여야만 했다.


 

경제적으로는 대동법을 평안,함경을 제외한 전국에 시행하여 민생의 안정을 추구했고 본격적으로 주전,즉 화폐제조를 실시했다. 흔히 우리가 잘아는 상평통보는 숙종의 때에 이르러 전국의 중앙,지방관청에서 유통되었는데 숙종이 상평통보를 발행한 목적은 국가 재정의 확충이라는 목적이 컸다.


 

숙종의 의도가 적중해서 이후 조선 말까지 화폐제조를 통한 이익으로 국가재정을 충당한다는 개념이 정착했다. 그래서 숙종의 치세에는 국가재정이 탄탄했고 조선 후기의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또한 군주로써의 책임감이 강해서 민생에도 많은 관심을 쏟기도 하여 야사에 성종처럼 평복 차림으로 몰래 나가 백성들의 생활을 살폈다는 이야기도 많이 남겼다.


 

이런 모습 때문에 명군으로까지 보는 시각도 있지만 정작 실상을 보면 민생에 "관심"을 가지지만 했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나 효과를 보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또한 부왕 현종이 기껏 예송논쟁을 통해 서인 산당의 세력을 약화시켜 서인과 남인간의 붕당의 균형을 간신히 맞추어 놓은 것을 환국을 통해 다 무너뜨려 정국의 혼란을 초래했으며 만년에는 아예 대놓고 노론의 편을 들면서 결국 조선 후기 노론의 일당 독재를 초래한 근본적 원인이 되었다. 이런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의 치세는 결국 영조, 정조 시대라는 조선 후기 중흥기의 기반이 되었던 만큼 제법 그 의의는 크다. 물론 그가 환국으로 촉발시킨 조선의 합리적 정치 시스템 파괴 역시 영정조 시대까지 지속돼 마침내 정조 대에 붕당 정치의 붕괴로 절정에 이른다. 그 결과? 다들 아는 세도정치 되시겠다. 또한 숙종 무렵부터 조선이 여러 가지로 사회적인 변화를 겪기 시작해서 그런지 딱히 장희빈 이야기가 아니라도 사극에서 배경으로 많이 다뤄지곤 하는 시기가 바로 숙종 시기.


 

여담으로 말하자면 본격 관우 빠돌이였다. 숙종은 개인적으로도 관우가 보여준 충의로운 모습에 푹 빠져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임진왜란 중에 들어왔지만 별 관심을 못받던 관우신앙을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이용[4]하면서 관우에 대한 제사를 국가 주관 제사로 격상시켰고 자신이 직접 제사에 참석해서 제삿상에 을 따르고 네 번이나 절을 올릴 정도로[5] 열렬히 관우를 숭배했다. 당시 좌의정이었던 서종태가 항의했지만 무시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실려있으니 관심이 있으면 찾아보시라. 이 외에도 조선에서 꽤 비호감 이미지를 가진 동물인 고양이를 정성스럽게 키웠다는 기록도 있다(고양이 문서 참조).


 

또한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숙종이 재임하던 시기에 일지매가 도적질을 하고 다녔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역대 국왕 중 재위기간이 두 번째로 긴 임금이다(1674~1720. 45년 10개월). 참고로 1위는 영조(1724~1776, 51년 7개월), 3위는 고종(1863~1907, 43년 7개월).



 

드라마 동이에서는 시청자들이 깨방정 혹은 허당으로 부르며, 대부분의 사극에 나오는 고풍스러운 임금님이 아닌 유쾌하고 천진난만한 그렇지만 머리가 잘 돌아가는 이른바 신세대 임금님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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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후에 왕비에서 폐한 장희빈 도 포함하자면 4번이다.
   [2]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왕권 강화 과정에서 무조건적인 충을 강조하고(그런 목적으로 단종의 충신들도 모두 복권되었다.) 왕가의 정통성을 다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작업이다. 이런 작업은 후대로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정조대에 이르면 광해군의 충신으로 여겨져 사사되었던 유몽인도 복권된다.
   [3]  왕권 강화라는 명분도 있었지만 송시열이 사약을 받은 계기가 장희빈의 아들을 태자로 삼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인 것을 생각하면 다소 감정적인 요인도 컸을 것이라 추측된다.
   [4]  한마디로 '너희들도 관공이 유비한테 한 것처럼 나한테 충성해라'라고 요약이 가능하다.
   [5]  이 때 숙종이 '선조대왕도 임진왜란 후에 사배(四拜)를 드렸다'란 전례를 근거로 들었는데, 선조는 명이 구원병을 보내 준 상황에서 찬 밥 더운 밥 가릴 상황이 아니었던 데 반해 숙종은 진심으로 '관공 하악하악'이란 마음가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