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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by 하야니2 2010. 8. 25.

http://nang01.cafe24.com/wiki/wiki.php/%EC%98%81%EC%A1%B0

 

영조
 
http://www.cha.go.kr/unisearch/imagefiles/treasure/20070216202118189000.JPG?width=440

연잉군 시절 영조의 풋풋한(?) 모습


위의 어진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영조 어진은 6.25전쟁 중 불에 타 버린 조선 역대 국왕의 많은 어진들 중 유일하게 온전하게 남은 어진이다.

조선의 역대 국왕
20대 경종 이윤 21대 영조 이금 22대 정조 이산

조선의 21대 국왕.

아들인 사도세자를 폐했기 때문에 22대인 정조는 그의 손자이다.

숙종의 아들 중 한 명. 한 때 왕비였던 희빈 장씨의 아들 경종과 달리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미천한 무수리 출신이었기에 즉위 이후 정통성 문제에 시달리게 되었다. 여러 야사나 일화에서도 평생 컴플렉스로 시달렸다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

경종이 즉위하던 기간에는 꼬투리를 잡히지 않도록 처신을 조심해야 했고 경종이 죽고 나서는 자신이 경종을 죽였다는 의심까지 받았기에 권위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다라는 명분 아래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의 생모 숙빈 최씨과부였기 때문에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최씨의 전 남편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혹은 영조에게 상당한 컴플렉스로 작용하였다.
여기에 전해지는 야사에는 영조가 음식궁합을 이용해 경종을 독살했다고 한다. 이때 사용된 음식이 과 "간장게장". 그것 때문에 남인일파에서는 "게장대왕"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또한 소론 강경파들을 영조가 직접 친국할 때 이들이 영조에게 "신은 몇 년 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습니다!"라고 외쳤을 정도.

아들인 장헌세자와의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그를 폐하고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이는 형벌을 내린다. 이후에는 이를 후회하며 사도세자란 시호를 내린다. 또한 세손인 정조를 정치적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붕당정치의 폐해를 줄이고 왕권을 강화한다는 이유로 탕평책을 실시했으나 영조 자신의 정치적 입장으로 인해 자신의 정치적 지지자들을 많이 깔아야 했고 이는 당간 세력 불균형으로 연결되어 실질적으로 완벽한 탕평정치가 이루어지기는 어려웠다.
또한 이 시기에 정치를 주도하던 세력은 여전히 노론이었으므로 이 시기의 탕평책을 완전한 탕평책으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는 영조도 처음에는 소론과 남인을 등용하려 했으나 이인좌의 난 때 가담한 자가 소론 계통이었던 점이 작용했기 때문.

통치기간 동안에는 나라가 상당히 안정적이었으며 일반 백성들에게는 상당히 너그러웠지만 관리들이 죄를 지으면 엄하게 죄를 물었다. 또한 상당히 검소한 삶을 살았는데 왕의 침실에 누덕거리는 이불과 베게만이 있고 식사는 밥과 김치, 장류 정도 뿐이었다고 할 정도였다고. "곡물을 낭비하게 된다"는 이유로 금주령을 내린 것도 이런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영조도 에 대한 욕망을 끊지 못해, 조선왕조실록 곳곳에는 몰래 먹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록이 나온다(본인은 오미자차였다고 강변).

역대 조선왕조 국왕들 중 가장 통치기간이 길며(52년) 가장 장수한 왕(83세)이기도 하다. 채식 위주의 식단이 이에 기여한 것으로 보이는데, 마찬가지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육류 위주의 식단을 즐기고 장수하지 못한 세종과 대비된다.

성격이 변덕이 심하며 강퍅하고 급해 화가 나면 신하들에게도 대놓고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나이가 들면서 노환이 생겨 경연 도중 신하가 자신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는 것을 가지고 볼기를 쳤다거나 잘못된 점을 신하가 간하자 곧바로 울며불며 뛰쳐나가 한겨울에 연못에 발을 담그고 엉엉 울어댔다고 한다.

또한 자신의 자식들 중 어떤 자식들은 지나치게 미워하고(ex. 사도세자, 화협옹주) 어떤 자식들은 매우 귀여워했다(ex. 화평옹주, 화완옹주)고 한다. 하지만 화협옹주가 죽었을 때는 새벽에 화협옹주의 집에 가고 신하들의 만류에 겨우 환궁하는 등 매우 슬퍼하였다고 실록에 나와있다. 위 기록이 한중록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영조의 편협함을 강조하려는 혜경궁의 과장, 왜곡이라고 보는 측도 있다.

하지만 딸을 지나치게 아낀 것은 실록과 한중록이 교차검증이 되기 때문에 딸들을 지나치게 편애한 것은 사실이다. 정실 정성왕후 서씨가 죽은 날에는 화완옹주의 남편인 정치달이 죽었는데, 이 날 신하들이 말렸는데도 불구하고 화완옹주의 집으로 달려갔을 정도였고 화평옹주가 죽었을 때는 그녀의 장례를 위해 파주의 민가 1백여채를 사들여 묘역을 조성하기도 했다. 하여튼 평소에도 대간, 대신들이 "출궁한 옹주의 사저로 납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라고 만류해도 무조건 "닥쳐"로 일관해가며 딸 사랑을 표현했다. 아마 조선 역대 국왕 중 최강의 딸내미바보.

영조의 쌍커플지고 길쭉한 눈과 오똑한 코에 조그마한 입술은 조선의 남성들이 추구하는 최고 미인상이였다. (정작 왕실에서는 이런 외모를 천하다고 여겨서 기피했다. 여담이지만, 가슴이 큰 여자도 무식하다고 해서(!) 기피했다.) 또한 66세의 나이에 15세의 정순왕후를 정실로 맞은 탓에 로리콘이라는 농담도 있다.

본래의 묘호는 "영종(英宗)"이었으나 1889년(고종 29년)에 영조로 고쳤다.

수명과 재위기간 외에 영조가 세운 기네스가 하나 더 있는데, 역대 조선 국왕 중 가장 정식 시호가 긴 임금이다.
정식 시호는 영조장순지행순덕영모의렬장의홍윤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영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英祖莊順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洪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 총 70자다. 그야말로 시호에 쓰는 글자들 중 좋은 글자는 거의 다 가져다 붙였다. 성군의 대명사로 알려진 (堯)와 (舜)의 이름까지 들어가 있을 정도니 말 다한 셈. 후덜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