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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헨리 8세, 숙종의 여인들. (후편)

by 하야니2 2010. 9. 27.

http://kin.naver.com/open100/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1332654

 

 

인현왕후 복위 이후 정국과 왕실은 비교적 평온하게 흘렀다.

특히 최씨는 연일 승승장구를 이어갔다.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왕자 금을 출산한 다음해인 1695년(숙종21년) 6월 8일 종 1품 귀인이 되었다.


3년 후인 1698년(숙종24년) 7월 7일, 세 번째 출산에서 세 번째 왕자를 낳았으나 왕자는 3일 만에 사망했다.

최씨를 향한 숙종의 사랑은 여전히 각별했으나 이 해(1698) 새로 첩지를 받은 후궁이 있었다.

  

첫 번째 첩지는 8월 2일 궁인 유씨가 받았다.

유씨는 숙원의 첩지를 받았는데, 첩지를 받으면서 유씨의 전택 마련에 6천금의 국고를 써 식자를 근심케 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작 숙원 첩지에 6천금을 내릴 만큼 유씨에 대한 숙종의 총애가 깊었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회임은 다른 후궁이 먼저 했다.

 


유씨가 숙원 첩지를 받은 석 달 후인 11월 4일 상궁 박씨가 역시 종 4품 숙원이 되었다.

박씨를 숙원에 봉하면서 숙종이 내린 비망기에 이런 내용이 있다.

 

“상궁 박씨가 빈어의 자리에 함께 있은 지 거의 10년이 되어간다. (후략)”

이는 박씨가 10년 가까운 시간 숙종의 승은을 받았다는 뜻이다.

어쩌면 박씨는 숙종 18년에 숙종의 승은을 입은 최씨보다 먼저 승은을 입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다 돌연(10년간 승은상궁이었을 테니) 박씨가 숙원이 되었는데 이는 그녀가 회임을 했기 때문이다.

왕을 모신지 10년 만에 회임이니 그녀의 나이 20대 중후반이었을 것이다.

총애는 이미 다른 여인에게로 기울었으나 후손이 박한 왕실에서 왕의 승은을 입은 여인이 회임을 했으니 전례대로 숙종은 박씨의 회임사실을 알자마자 숙원의 직첩을 내린 듯하다.

회임하는 후궁도 적은 판에 낳은 아이마다 죽어나가고 이때 살아있는 숙종의 자손은 장옥정의 아들 왕세자 윤(당시 11세)과 최씨의 아들 금(당시 5세) 뿐이었다.


숙종은 회임을 한 박씨에게 숙원을 주고 그녀의 출산을 기대했다.

1699년(숙종25년) 6월 13일 왕자 훤(후일 연령군)이 출생했다.

그해 10월 23일 단종대왕을 복위한 기념으로 후궁들의 품계를 올렸는데,

귀인 최씨를 숙빈으로, 숙원 유씨와 박씨를 숙의로 승급시켰다.


이로서 최숙빈은 내명부 내에서 명실상부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이은 서열 3위의 여인이 되었다.

이어 두 달 후인 12월 24일 왕자 금이 6세의 나이로 연잉군에 책봉 되었다.

최숙빈의 나이 서른이 되던 해였다.

 


그렇게 평온하게 세월이 흐르는 듯 했으나 인현왕후와 최숙빈 그리고 장옥정과의 악연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았다.

 

인현왕후가 복위한지 7년 만인 1701년(숙종27년) 8월 14일 35세의 젊은 나이로 왕후가 사망한 것이다.

인현왕후가 사망하기 전부터 장옥정이 자신의 처소에서 왕후를 저주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소문을 숙종에게 전달한 인물은 역시 최숙빈이었다.

 

숙종은 인현왕후의 복위를 결심한 이후 장옥정에 대한 정을 완전히 떼었다.

어쩌면 그것은 장옥정을 대체할 여인 최씨가 나타났던 그 순간부터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남인이 최숙빈을 독살하려 했다는 소문에 즉각 반응했고, 이번에도 장옥정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주장에 거칠게 반응했다.


숙종은 이번에도 사건의 정황을 조사하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실제로 장옥정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는지에 대한 사실 여부는 현재로선 알 수 없다.

숙종과 조정이 그것을 사실로 믿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들은 단지 장옥정을 제거할 명분을 찾았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했는지도 모른다.


장옥정 제거 계획은 인현왕후가 죽고 한 달 만인 9월 23일 장옥정의 오빠로 그녀의 수족이 되어 더러운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장희재를 처형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어 보름만인 10월 8일 드디어 장옥정에게 자진하라는 어명이 떨어졌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자진으로 마감한 장옥정의 나이 43세였다.

 


최숙빈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이제 그녀를 죽이려는 세력은 없다.

게다가 인현왕후와 장옥정이 한 번에 가게 생겼으니 다음 중전 자리를 노려보지 않았을까?

전혀 욕심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

단순히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장옥정을 무고했다 하기엔 지나치게 대범하지 아니한가?

게다가 후일을 맡길 건강한 아들도 있으니.


내심 중전자리를 바라고 있을 최숙빈에게 청천병력 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장옥정이 자진하기 하루 전인 10월 7일, 숙종이 후궁은 왕비의 자리에 오를 수 없게 하라는 하교를 내린 것이다.

최숙빈을 염두하고 내린 하교였을까?


숙종으로서는 후사인 왕세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죄인이었으나 장옥정을 폐서인으로 삼지 않고 희빈으로서 자진하도록 명한 것이었다.

어미가 죄인으로 죽었으니 왕세자의 입지는 이미 곤란해 졌다.

그런 중에 건강한 아들을 둔 최숙빈을 왕후로 삼는다면 왕세자의 입지가 더욱 곤란해 질 것이라 염려한 것일까?


혹시 꾸었을지 모를 왕후에 대한 최숙빈의 꿈은 그렇게 접혔다.

그러나 최숙빈에게는 그보다 더 암담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해인 1702년(숙종28년) 10월 13일 인원왕후 경주 김씨가 왕비로 책봉되어 입궁하였다.

숙종의 나이 42세, 인원왕후의 나이 16세였고, 최숙빈의 나이 33세였다.


이미 숙종의 사랑을 받은 지 10년이요, 그의 아들을 셋이나 낳은 최숙빈 이었으나, 꽃 같은 나이에 숙종이 직접 왕비 간택한 인원왕후에게는 밀리는 양상이었던 듯하다.

이후 최숙빈에 대한 기록이 한동안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인원왕후 김씨가 왕후 책봉되고 10일 후 숙종도 또 대대적인 후궁 진봉식을 가졌다.

왕후 간택을 축하하며, 후궁들에게 왕후의 존엄함을 알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본래 후궁 책봉은 왕이 아니라 내명부 수장인 왕후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왕자 훤을 낳은 귀인 박씨(숙종 25년 11월과 숙종 28년 9월 사이 숙의에서 귀인으로 진급했으나 기록이 없다)는 정1품 명빈이 되었고, 숙의 유씨는 소의가 되었으며, 한동안 잊혀졌던 여인인 귀인 김씨는 영빈이 되었다.

 

귀인 김씨는 21세 나이에 인현왕후 폐위에 앞서 숙종의 동향을 친정에 알렸다는 죄목으로 폐서인 되어 사가로 내쫓겼던 그 여인이다.

역시 인현왕후 복위되던 해에 먼저 복위되어 다시 김귀인이 되었던 그녀가 이제 34세의 나이로 김영빈이 된 것이다.


박명빈은 빈을 받은 지 1년도 못되는 1703년(숙종29년) 7월 15일 사망하였다.

왕의 사랑을 받은 것은 15년 이며, 어렵게 낳은 아들은 고작 5세의 어린 아이였다.

숙종은 어린나이에 어미를 잃은 막내아들을 안타까이 여겨 항상 곁에 두고 보살폈으며, 그해 9월 3일 전례 없이 일찍(본래 왕자명호는 7세 무렵에 내려진다) 어린 아들을 연령군에 봉하였다.


다음해인 1704년(숙종30년) 최숙빈의 아들 연잉군이 11세의 나이에 서종제 녀 달성 서씨를 맞아 길례를 올렸다.

달성군부인 서씨의 나이 연잉군 보다 2세 많은 13세였다.

연잉군이 길례를 올리자 출합의 문제가 대두 되었다.

출합이란 길례를 올린 왕자나 왕녀를 궁 밖으로 이사 보내는 것을 말하는데 새집을 짓거나 헌집을 개보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숙종조 말년에 왕실의 재정이 넉넉하진 않았던 듯하다.

숙종은 유씨를 후궁 삼을 때도 거금을 써 중신들을 한숨짓게 하더니 사랑하는 왕자를 출합 보내면서도 거금을 들여 집을 지어 주려 하니 중신들이 남몰래 탄식 하더라는 기록이 실록에 있는데 그 중 이런 대목이 있다.


“숙빈 최씨는 이현에 크고 너른 집이 있는데 임금이 또 왕자를 위해 별도로 저택을 짓고자 하였다.”


최숙빈에게 크고 좋은 집이 있는데 거기 놔두고 또 새집을 지어 준다는 사실에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이다.

부모 없는 천애 고아인 최숙빈의 사가가 크면 얼마나 크다고 왕자의 사저로 손색이 없다는 것일까?

단순한 최숙빈의 사가가 아닌 최숙빈이 현재 머물고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로 이현궁은 숙빈방이라고도 불린다.

 

최숙빈은 어느 순간 그러니까 인원왕후가 간택된 숙종 28년 10월 이후부터 연잉군이 길례를 올린 숙종 30년 4월 사이 궁 밖에 처소를 두게 되었다.

자연히 여전히 궁 안에 거소하는 숙종과 아들 연잉군을 자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숙종이 왜 10세도 안된 어린 아들과 어미를 떼어 놓았는지는 의문스럽다.

최숙빈이 뭔가 큰 잘못을 한 것일까?

노골적으로 중전자리를 탐했다가 숙종에게 미운털이 박힌 것일까?

단순히 사랑이 식었다고 하기엔 뭔가 미심쩍다.

게다가 출합하는 아들과 함께 사는 것도 허락 되지 않았다.

굳이 새 집을 지어 주겠다고 한 것이다.


최숙빈이 아들과 함께 사는 것이 허락 된 것은 1711년(숙종37년) 6월 22일 이다.

이날의 실록을 보면 숙종이 연을 타고 이현궁 옆을 지날 때 마다 저 크고 넓은 집에서 최숙빈 혼자 사는 것이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며 거처를 아들이 사는 창의궁으로 옮기는 것을 허락한다고 기록 되어 있다.


안타깝고 미안했다 하기엔 무려 7년이 흐른지라 느닷없는 감이 없지 않지만, 최숙빈은 마흔둘이 된 이 해부터 죽는 순간까지 아들과 함께 며느리의 효도를 받으며 여생을 보낼 수 있게 됐다.

아쉽게도 그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47세 되는 숙종 42년부터 병에 걸려 자리보전하게 되었고, 2년의 투병 끝에 숙종 44년(1718) 3월 9일 49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연잉군의 나이 25세로 이미 많은 추억을 함께 했을 것이다.


한편 연잉군이 출합한 다음해인 1705년(숙종31년) 숙종은 새로운 후궁을 맞이했다.

그의 나이 불과 45세였다.

 

궁인 김씨로 5월 1일 숙원이 되었다.

그녀가 회임을 한 것은 아니었다.  순수하게 왕의 총애가 깊었을 뿐이었다.

숙종은 새 후궁에게도 넉넉한 은사를 베풀었는데, 사관이 왕이 색을 밝히고 있으나 아무도 간하지 않는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김씨는 어느새 숙의가 되었고, 1710년(숙종36년) 귀인으로 진봉 하였다.

귀인 김씨는 1720년 숙종이 향년 60세로 사망할 때까지 공식적인 숙종의 마지막 여인 이었다.

 

숙종은 평생에 걸쳐 세 명의 정궁과 여섯 명의 후궁을 두었다.

 

그 중 왕후 두 명과 후궁 두 명은 숙종 생전에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8명의 자녀 중 6명을 생전에 잃었다.

 

왕후와 후궁을 폐하고 복귀 시키기를 정치적인 이유로 일삼았고, 총애하던 후궁 하나는 저주의 누명을 쓰고 사사 당했으며, 총애 하던 다른 후궁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궁 밖에서 죽어야 했다.

 

숙종은 비정한 남자였다.

작심한 바가 있다면 반드시 이루었고, 방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두번의 환국으로 수십, 수백의 사람이 죽어야 했으나 그로 인해 강력한 왕권을 누렸다.

왕권을 위해 여자를 이용하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숙종은 장희빈의 남자로 유명하다.

그러나 장희빈과 인현왕후, 최숙빈이 만들어낸 암투의 장은 숙종이 마련한 무대 위에서 진행되었다.

그것에는 언제나 숙종의 뜻이 반영되었다.

 

 

 

숙종대왕 선원록

 

숙종(조선 제19대 왕) 이돈(1661.8.5-1720.6.8)

현종 1남, 명성왕후 김씨 소생

재위 1674.8-1720.6. 45년 10개월

즉위 14세, 향년 60세.

부인 9명, 자녀 6남 2녀(조졸한 3남 2녀 포함)

 


숙종(1661-1720)


인경왕후 광주 김씨(1661-1680)

                  -- 1녀 공주(1679-1679, 조졸)

                  -- 2녀 공주(1680-1680, 조졸)

 

인현왕후 여흥 민씨(1667-1701)


인원왕후 경주 김씨(1687-1757)


희빈 인동 장씨(1659-1701)

                  -- 1남 경종 윤(1688-1724)

                     = 단의왕후 청송 심씨

                     = 선의왕후 함종 어씨

                  -- 2남 성수(1690-1690, 조졸)


숙빈 해주 최씨(1670-1718)

                  -- 3남 영수(1693-1693, 조졸)

                  -- 4남 영조 금(1694-1776)

                     = 정성왕후 달성 서씨

                     = 정순왕후 경주 김씨

                  -- 5남 왕자(1698-1698, 조졸)


명빈 박씨(? -1703)

                  -- 6남 연령군 훤(1699-1719)

                     = 상산군부인 상산 김씨


영빈 안동 김씨(1669-1735)


소의 유씨(? - ?)


귀인 김씨(? -17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