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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숙빈최씨..

by 하야니2 2010. 5. 19.

[동이의 파란 물동이]

당쟁이 격화되어 반대파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숙종의 시대, 서인으로 대표되는 인현왕후와 남인으로 대표되는 장희빈 사이에서 숙종의 승은을 입어,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백척간두의 상황에서, 자신과 아들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부단하게 노력했던 숙빈최씨, 궁궐에서 쓸 물을 위해 하루종일 물동이를 이고 날랐던 한 여인의 숨어있는 눈물이 어떻게 파랗게 승화되어 조선제일의 여인상, 어머니상으로 만들어져 가는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한 번 느껴보도록 하자.

 

 

■ 개설

무수리에서 일약 왕의 어머니가 된, 숙빈 최씨의 숨어 있는 눈물이 베어 있는 곳인 오늘날의 서울 종로구 궁정동宮井洞. 궁궐과 우물이 지명에 함께 포함돼 있는 궁정동은 숙빈 최씨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숙빈 최씨는 궁녀들에게 세숫물을 떠다 바치는 수사水賜(궁궐에 필요한 물을 나르는 무수리)였다. 바로 이 궁정동의 옛 자리에 궁궐에서 주로 사용하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궁중에서 가장 천하다는 무수리로 입궐하여, 숙종의 승은을 입어 연잉군을 낳고 마침내 그 품계가 정1품 빈嬪에까지 이르렀고, 아들인 연잉군은 왕위에 올라 52년간이나 조선왕조의 중흥을 이끌었으니, 조선의 르네상스시기 숙빈 최씨는 가장 극적인 삶을 산 여인의 표상이었다.

 

 

■ 태생과 관련된 기록

1. 영조가 즉위 1년(1725) 금평위 박필성에게 짓게 한 숙빈 최씨 신도비명에는 숙빈최씨의 아버지는 최효원으로 충무위부사과이며, 조선 21대 왕인 영조의 어머니이다. 숙종 2년(1676) 선발되어 궁으로 들어갔으며, 모든 비빈이나 궁인을 접대하되 공손하고 부드러워 모두 그 환심을 샀다고 기록되어 있다.

 

2. 야사에는 최씨가 지금의 전라북도 태인 사람으로,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아로 자랐다고 한다. 인현왕후의 부친 민유중이 인현왕후를 업은 부인 송씨와 영광군수로 부임하러 가는 도중 정읍 태인면의 대각교에서 고아로 떠돌던 최씨 소녀를 만났다. 인현왕후의 어머니는 어린 숙빈이 당시 8세였던 인현왕후와 닮은 데가 많은 것을 보고는 가엽게 여겨 함께 데리고 갔다. 그 후 인현왕후가 입궐하면서 궁녀로 들어왔다고 한다.

 

 

■ 숙종과 최씨의 드라마틱한 만남

1. 숙종은 기사환국 이후 희빈 장씨에 대한 애정이 식어갈 무렵 인현왕후를 폐비시킨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었다. 조선후기 이문정이 쓴 수문록隨聞錄을 보면, “숙종이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 시킨 지 5, 6년이 지난 후 어느날 궁궐을 거닐다가 한 궁녀의 방에 불이 켜진 것을 발견하고 그 방을 찾았다. 최씨는 자신의 방에 떡과 음식을 차려놓고 천지신명에게 자신이 모셨던 민씨의 만수무강을 빌고 있었다. 사유를 묻는 숙종에게 내일이 인현왕후의 탄신일이어서 왕후가 평소에 좋아하던 음식을 차려놓고 비는 중이었다고 대답했다.”

 

2. 숙종은 궁녀만도 못한 자신의 경솔했던 처사를 후회하면서, 옛 주인을 섬기는 그 궁녀를 갸륵하게 여겨 가까이 했고, 아들을 낳았다. 오래 살라는 의미에서 영수라고 지었지만, 두 달 만에 조졸하고 만다. 숙종 20년(1694) 9월 최씨가 둘째아이(영조)를 출산하자 숙종은 출산을 도운 호산청의 내시와 의관에게 내구마를 상으로 주었다. 우의정 윤지완이 ‘내구마가 어찌 환시와 의관이 감히 받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라고 차자를 올려 반발했지만 왕자가 드물었던 궁궐에서 숙종의 기쁨을 꺾을 수는 없었다. 나중에 무수리 최씨는 숙원에서 내명부 1품인 빈으로 책봉되는 영광을 안았다.

 

 

■ 숙빈최씨, 장희빈과 대척점에 서다.

1. 장희빈의 득세로 권력을 되찾은 남인세력을 몰아내는데 두 차례에 걸쳐 숙종에게 결정적인 밀고를 한 사람이 바로 숙빈최씨였다. 수문록에 주로 장씨가 최씨를 핍박했다는 내용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은 최씨가 서인인 인현왕후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숙빈최씨는 숙종의 장인인 김만기와 연결 되어 있던 숙종의 유모인 봉보부인과도 가까웠다.

 

2. 숙종 20년(1694)에 일어난 갑술환국을 보면, 인현왕후의 오빠였던 민진원은 단암만록에서 ‘김춘택이 봉보부인을 통하여 최씨와 계략을 세워 남인의 정상을 주상에게 자세히 보고하여 환국이 이루어졌다’고 적고 있다. 당시 조정은 남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서인 김춘택은 남인에게 빼앗긴 정권을 되찾기 위하여 서인들과 모의를 하고 있던 중, 여기에 가담했던 김석주의 가인家人 함이완이 남인들의 회유에 넘어가 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게 되었다.

이를 들은 숙종이 역모 관련자들을 심문하도록 하자 서인은 오히려 남인 장희빈의 오라버니 장희재가 장모로 하여금 숙빈 최씨의 생일날 독이 든 음식을 가지고 입궐케 하여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때 최씨가 독살설이 모두 사실이라고 함으로써 숙종은 서인측 주장을 받아들여 남인들을 정계에서 퇴출시키고 이로인해 조정은 서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3. 숙종 27년(1701) 인현왕후 민씨가 병사한 후 장희빈이 내전을 질투하여 모해하려고 했다며 자진명령을 내린다. 세자의 애걸과 많은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장희빈은 10월 10일 사사된다. 실록을 보면, “대행 왕비가 병에 걸린 2년 동안에 희빈 장씨는 비단 한번도 기거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궁전’이라고 하지도 않고 반드시 ‘민씨’라고 일컬었으며,....... 취선당의 서쪽에다 몰래 신당을 설치하고, 매양 2, 3인의 비복들과 더불어 사람들을 물리치고 기도하되, 지극히 빈틈없이 일을 꾸몄다........ 이때에 이르러 무고의 사건이 과연 발각되니, 외간에서는 혹 전하기를, “숙빈 최씨가 평상시에 왕비가 베푼 은혜를 추모하여, 통곡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임금에게 몰래 고하였다.”

 

 

■ 숙빈최씨, 아들을 통해 다시 태어나다.

1. 숙빈최씨는 숙종 44년(1718)에 49세의 나이로, 영조가 즉위하기 전에 별세하여 왕실의 법도에 따라 왕비의 무덤인 능이 아닌, 묘에 모셔지게 되었다. 숙빈 최씨가 세상을 떠나고 6년 뒤에 왕위에 오른 영조는 어머니의 불행한 신분을 잊지 못했다. 영조는 최씨의 무덤 근처에다 막을 짓고 무덤를 받들었으며, 친필 비와 비각을 4곳에 세웠다.

 

2. 영조는 생모에 대한 효심과 열등의식으로 즉위 초부터 숙빈최씨의 묘를 능으로 만들길 원했다. 즉위 후 소령묘를 왕비릉으로 격상시키고자 애를 쓰지만, 조정 신료의 반대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다가, 후일을 기약하고 숙빈 해주최씨 소령묘라는 친필 비석을 세우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영조의 마음을 읽은 몇몇 사람들이 소령원을 능으로 추봉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영조는 상소의 내면에 숨겨진 뜻을 알고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조는 즉위하던 해인 1724년 생모를 기리기 위해 경복궁 이웃에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을 짓고 숙빈묘라 했다. 영조는 숙빈 최씨의 사당을 짓고는 직접 제문을 지어 올리며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영조 20년(1744), 영조는 어머니의 묘호를 '소령'으로 올린 뒤 묘갈墓碣(무덤 앞에 세우는 비)에 이런 글을 새겼다. “아! 25년 동안 낳아주고 길러주신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을 듯하다....... 붓을 잡고 글을 쓰려 하니 눈물과 콧물이 얼굴을 뒤덮는다. 옛날을 추억하노니 이내 감회가 곱절이나 애틋하구나.”

 

3. 영조 29년(1753)에는 숙빈묘를 승격시켜 육상궁이라 부르면서, 다시 한번 소령원에 친필 비석을 세우게 된다. 숙빈 최씨에게 화경이라는 시호를 붙인 후 조선국 화경 숙빈 소령원이라는 친필 비문을 새긴 비석을 만들었다. 숙빈 최씨의 묘소는 소령원으로 봉해졌다.

 

 

■ 결어

역사적으로 보면, 숙빈최씨는 자신이 모셨던 인현왕후 민씨가 폐서인되어 있는 상황에서, 지난날 중전의 자애로움을 잊지못해 상기하다가 우연히 숙종의 눈에 띠어 승은을 입게되는 의로운 여인으로 묘사를 하고 있지만, 실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환국의 정국에서 정세를 세밀히 꿰뚫어 내다보면서, 자신과 아들 연잉군의 삶을 위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적절한 지를 놓고, 슬기롭게 잘 대처해 나갔던 총명하고 영민한 여성이었다.